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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걸리버의 이웃과 뽈리포니의 관람자


학예기획실   /   1997년 제8회 뽈리포니전 도록   /   1997.


                                                                이 희 영,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 연구원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는 누구에게나 친밀하다. 그것은 걸리버라는 주인공이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하면서 격은

   

 형의근원스튜디오의 옥상에 모인 뽈리포니 그룹, 1997
   이종필, 이학재, 이연수, 박성호, 이재임

기행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흥미로운 형식이다. 사람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문장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현실보다 더 생생한 체험을 맛보고 심지어 그것들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 어떤 이는 그 속에서 겸양의 미덕을 발견하고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상식의 오만을 깨우친다며 그것에 값을 메기기도 한다.

소설의 저자가 그와 같은 계몽적 의도가 있든 없든 혹은 사람들의 깨달음이 무엇이 되든 걸리버와 함께 머나먼 세계로 여행하는 체험은 그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곧장 현실과 대조되는 특수한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그 곳은 사람의 눈과 마음이 흰 종이 위에 빽빽하게 새겨진 활자와 마찰하는 장소이다. 그 곳에서 일상의 사람은 어느덧 자신의 삶과 변별되는 특수한 체험을 향한 독자가 된다. 방관자의 눈에 활자와 종이의 흰 여백은 문장으로 판독되지 못하고 물리적 현실로만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독자는 활자들을 문장으로 판독하고 여백을 자신의 상상력이 확장되는 무한한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마음의 자유가 체득되고 과거와 먼 곳의 음성들이 들려오는

관악산 언덕을 오른 뽈리포니들, 1989
류정일, 이연수, 이학재, 정효심, 한응전

그 특수한 영역은 문학이라는 개별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여타 예술의 모든 매체들 간을 통괄하는 특질로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매체가 개별 예술의 특질로 강조될 때에는 그와 같은 상상력의 범위가 무시돼 보이거나 축소돼 보이는 사례들이 지나 세기 이후 급격히 전개된 예술의 현대화 과정에서 목격된다.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여 시의 매체적 자율성을 밝히기 위해 1910년대에 인접한 시기에 “문학성”이라는 술어를 고안했던 오포야즈(Opoyaz) 집단의 실험들이나 그들을 계승한 언어학 학파들이 시어를 극단적인 단위로 전개해 왔던 것들은 그 것의 적절한 사례가 된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로부터 그와 같은 징표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도판 1
  이종필,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1997, B/W사진, 모터, 회전축, 우드락, 235x128x20

특히, 전후 미국에 이르러서 미술의 매체가 회화를 중심으로 단위화되고 급기야 실재하는 현실의 대상물과 동등한 특질을 보임으로써 매체의 내용이 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예술의 개별 영역이 돋보일수록 그 곳에는 독자 혹은, 관람자의 자리가 없는 것으로 가정되거나 관람자의 부재가 요구된다. 이 사례들은 예술의 본질과 그 순수성의 강조가 결국 예술의 중요한 특질인 상상력의 무시에 귀결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쨌던 매체 본질의 특질이 제아무리 강조될 지라도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한 혹은, 그와 같은 권리를 구가하는 예술이 현실을 이웃으로 하고 있고 그 속에서 창출된 제도에 의존하는 한, 관람자를 벗어날 수 없다. 무엇보다 미술품을 창작하는 미술가 그 자신은 자신의 제작품 앞에서 가장 중요한 관람자 일 것이다.

    Parmigianino, 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



<걸리버의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독자는 걸리버가 들려주는 소인국의 백성과 거인국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걸리버에 관한 그들의 상반된 견해들을 들을 뿐이다. 걸리버는 독자와 동등한 현실의 규격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인국 백성들의 마음에서는 거인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인국의 공주에게는 갖고 놀기 딱 알맞은, 살아있는 꼬마 인형 정도로 간주된다.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는 중립적 속성이 보는 이의 마음과 가치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은 화랑 공간에 던져진 한 덩어리의 미술품이 관람자들의 취미와 마음들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는 것과 동일하다.

걸리버의 규격이 난쟁이와 거인의 특성을 동시에 포괄함으로서 일상의 방관자를 독자로 전환시키듯 한 점의 미술품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상반된 시각적 외관을 갖는다. 화랑 공간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회화 혹은, 조각에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형태의 소용돌이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비판함으로써 예술적 상상력을 체험한다. 걸리버의 이야기에서 독자를 주목시키는 결정적 동기는 중립적 성격의 화자가 난쟁이로 해석됨과 동시에 거인으로 해석되는 양면 가치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는 이 들 대립되는 특성을 자신의 마음으로 통합하면서 겸양의 미덕이나 상식의 오만과 같은 특질을 그것에 부여한다.

나는 이번에 뽈리포니 집단이 제시하는 매체들에서 관람자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관람자로서 미술가의 위치를 밝히려한다. 응당 그와 같은 나의 의도는 그들의 매체가 갖는 상상력의 특성을 밝히는 궁극의 목표로 향해 있다. 여기의 한정된 지면과 제작의 맥락을 깊게 관찰할 수 없었던 몇몇 뽈리포니 구성원들의 작품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나의 목표 설정은 그 출발에서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끊이지 않고 9년여의 세월을 미술 현장에서 함께 제작하고 발표해온 동질성을 보여왔고 그 만큼 그들 간의 맥락이 특색을 띠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나의 무리한 의도는 앞으로 더 큰 관제를 수행할 첫 걸음에는 기여할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추후에 충분히 회고 가능한 시기에 종합된다면 뽈리포니 집단이 제작한 매체적 특성과 상상력의 경로는 지금보다 더 뚜렷하게 밝혀질 것이다. 

  Caravaggio, David and Goliath



I.
이 전시회에 진열된, 이종필의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도판 1)에서 외관의 두드러진 대립과 마찰은 분할된 개별 단위들의 엇갈리는 움직임이 초래하는 교란과 전체 화면에 투사된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한다. 관람자는 이러한 교란을 하나의 수수께끼로 주목하고 일정한 거리와 오랜 시간 동안 지나간 개별 장면들을 재구성해야 비로소 제작자의 전반적 설계를 파악할 수 있는 해답에 도달한다. 관람자는 각각의 개별 단위들이 전체로 이행되는 경로를 통해 그리고 그 작품의 앞 뒤 이미지들 간의 분별을 통해 그 전체 화면 내부의 인물들 간에 관련된 연상을 스스로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시각의 단위들이 시간과 관련되는 알래고리가 창출된다.

이종필의 알래고리는 미술가 스스로 관람자가 되는 자각의 경로를 갖고 있다. 가령 앞 뒤 양면에 투사된 이미지들 중 전방을 주시하는 한 여인과 대면하게되는 관람자는 그 여인이 전체 화면의 틀 넘어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한 편 그 곳에서 그녀가 관람자 자신을 보고 있는 것으로도 가정한다. 여기에서 관람자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을 {응시하고 있는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은 …) …응시하고 있는} 그 자신을}보게된다.1)

1) 이 것은 케리어(David Carrier)가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의 <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에서 관람자의 조건을 설명하는 표현을 빌린 것이다.

David Carrier, “Art and Its Spectators”,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xlv, no.1, (Fall 1986), p.5.

 

관람자는 자신과 틀 넘어의 여인 사이에 무한히 반복되는 주체와 객체의 전환 관계로부터 소외된 채 전방을 외면하는 한 사내를 보게된다. 그는 바로 미술가 자신의 이미지이다.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이종필은 자신을 매체를 통해 확증하고 스스로 관람자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살인을 저지른 화가 카라바지오(Carravagio)가 어린 다윗(David)의 손에 들여져서 전방으로 돌출하는, 참수당한 골리앗(Goliath)의 얼굴을 자신의 초상으로 표현한 <다윗과 골리앗>과 매체에 대한 자각의 통찰력에서 상통한다고 본다.



 
II.

이종필의 분열들이 대상에 대한 관람자의 지속되는 주목에서 판독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권정준의 분열은 시간의 지속보다 오히려 단속에 더 연관돼 보인다.

  도판 2
    권정준, "3 D-Seeing Now", 1997,
   
인화된 사진 조각 169장, 118.4x127.6(전체)

권정준이 제시하는 개별 단위들의 분할이 나열의 방식에 의존됨으로써 관람자를 구성의 판독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3D-Seeing Now>(도판 2)에서 개별 단위들 사이는 실재하는 화랑의 벽면 공간이 끼어들어 미술가가 치밀한 계산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투사한 하나의 피사체는 독립된 틀 속에 완전한 형태를 유지한다. 관람자는 동일한 대상이 상, 하, 좌, 우, 여러 방향에서 보여지는 방식을 동일한 위치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 관람자는 자신의 의식으로의 소급이나 지속되는 연상을 꾸릴 수 없게된다. 관람자는 자신의 눈앞에 것만 볼 뿐 더 이상의 지각을 갖지 않아도 대상 하나를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점이 권정준이 제시하는 공간이 시간의 단속으로 가정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권정준이 유지하는 화랑 공간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이다. 그와 같은 해석은 지극히 관습적인 것으로서 개별 단위화 된 사각형 평면이 미술의 역사에서 발휘해 온 단속과 동일하다. 여기에서 나는 권정준의 매체가 띠는 상반된 외관상의 대립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물의 모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각각의 평면이 의존하는 화랑 공간의 위력과 사물의 실존적 환경 간의 갈등과 대비이다. 관람자는 이들 양 자 사이에서 자신의 분별력으로 그 갈등을 극복하려한다. 그럴 때 관람자는 확연한 선택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권정준의 매체는 바로 이 지각의 선택 국면의 조건으로 여타의 비판이나 취미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다.

  도판 3
  이연수, "Hole", 1997, 혼합재료, 120x320x45(전체)

 


III.

권정준의 매체가 수동적으로 숨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건들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의식의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면 이연수는 그와 같은 양자 택일에서 자신의 경로를 감수성이나 취미와 같은 마음의 문제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걸리는 그녀의 구조물 <홀>(
Hole, 도판 3)은 다양한 외관의 형식을 띠는 삶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수동적 비판 즉, 취미와 매체 간의 다의적 국면을 건축적 형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하나의 구축물은 지극히 물리적 조건의 대상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수의 구조물에서는 시 감각과 연장된 심리 작용을 유도하는 요소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 중 팽창하는 스판 소재의 텍스츄어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 소재는 그것의 배면이 어느 정도 비춰 보임과 동시에 그것을 지지하는 틀의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에서 대립된 외관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기에 적절해 보인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상반된 성격에서 이연수의 관람자는 스판 소재가 띠는 투명성이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지속시켜온 일련의 회화들에서 상반된 형태의 윤곽들에서나 특정의 형상과 배경 간의 관계를 구획하는 경계들을 흐리게 처리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2)

 

2) 이와 같은 효과는 「제 6회 뽈리포니 전」에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연수의 그 이전 특성과의 연관을 추적하면서 바로 이 경계 흐리기 효과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은 나에게 상당히 당황스러운 염려로 목격되었기에 그 녀의 매체가 “독자적 실체로 완전한 이행을 목한 채 감수서의 전달 수단으로 여전히 머물고 만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류였다. 왜냐하면 이미 당시에 이연수의 매체는 특성의 변형에 관한 뚜렷한 형식이 시도 되고 있는 것이 이번 전시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과거 그녀의 회화들에서 애매한 경계들은 벽면으로부터 돌출하는 캔버스 전체 형태의 물질적 대상성과 대비되어온 요소였다.

벽면에 걸린 그녀의 구조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존재가 사라지는 가정을 창출한다. 이와 같은 비물질화는 매체에 대한 관람자의 시각적 진실이 그것과 다른 것으로 특질이 변화하기에 가능하다. 스판 소재의 시각적 형태는 견고하지만 그것의 표면을 의식하는 관람자의 마음에서는 결코 견고한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기서 관람자는 자신의 혼란을 수습하고 환원시키는 과정을 통해 화랑 공간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지각 조건을 스스로 부정해 버린다. 결국 관람자는 자신의 시각적 진실과 마음의 해석간의 갈등의 여타의 감각 조건인 청각으로 비해가거나 그렇게 번역해 버린다. 이 점에서 이연수의 매체는 시각이 청각의 특질로 화학적 변화를 해간다고 나는 보고 있다. 관람자의 부재 그것은 이연수 자신이 자신의 미술 앞에 서 있는 자리이다.



IV.

박성호 또한 앞에서 언급한 세 명의 미술가들과 같이 재료의 견고함과 관련된 작업을 보이지만 그는 매체의 속성 그 자체를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성형하거나 모방하는것에서 그들과 차이를 유지한다. <존재 공간>(도판 4)에서 관람자가 자신의 경험에 소급하여 파악해 내는 조약돌과 자갈들은 실재하는 현실의 것이 아닌 주조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 한 것은 전통적 회화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을 재현하는 환각이란면 박성호의 주조물들이 현실에 실재하는 특정의 물체에 대한 물질적 재현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박성호의 재현물은 이미지 상태의 마음에 호소하기 보다 차라리 매만지고 여러 방향에서 지각 가능한 구체물의 허구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박성호의 매체가 이름 숨김이나 진실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서 관람자의 존재를 해석해 내고 있다.

 도판 4
 박성호, "존재공간", 1997, 한지 캐스팅, 40x40x8



이와 같은 박성호의 매체에서 나는 가상과 실재 간의 상반된 대립에 주목한다. 앞의 미술가들이 작품 외관의 상반된 특성의 절련된 상태에 관람자를 위치시키는 반면 박성호의 관람자는 외관들의 대립이 교차하는 장소에 위치된다. 이와 같은 관람자의 위치는 매체의 내부에 위치되는 19세기 이전의 회화 공간과 매체의 외부 즉, 실재하는 공간에 위치되는 오브제 미술의 공간 사이의 절충적 위치로 보인다. 박성호가 자신의 매체를 통해 미술가적 존재를 확정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린다면 그의 “존재 공간”은 다소 안전한 영역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절충적 위치란 마음먹기에 따라 주장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V.

앞에서 다룬 네 명의 미술가들이 매체의 물리적 속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제작을 해왔다면 이재임은 이들과 달라 보인다. 이재임은 자신의 매체를 철저하게 환각의 조건에서 다루고 있고 관람자 또한 그 영역에 설정해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임이 제작한 <벽 95-II>(도판 5)을 둘러싼 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재임이 수공으로 제작한 것이다.

도판 5
이재임, "벽-95 II", 1997, 혼합재료, 240x200x150

그 표면 또한 작품의 내용에서 진행된 칠의 밀도와 동등하고 심지어 관람자의 판독이 작품의 내용물에 관한 사건들이 틀에까지 연장되는 것으로 이끌린다. 이 점에서 이재임의 관람자는 대상과 고립되는 것도 그렇다고 대상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닌 절충적 위치에 서게 된다. 따라서 이재임과 박성호의 관람자 위치는 동일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임의 매체를 응시하는 관람자는 이재임의 매체를 시간과 거리를 두고 대하면서 자신의 성격의 변화를 갖는다. 이 점은 박성호를 비롯한 앞의 미술가들이 창출하는 관람자와 구분되어 보인다. 이재임의 매체는 전적으로 환각에 의존한 형태를 지니기에 관람자의 위치는 움직일 수 없고 따라서 시간의 개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회화의 알맹이와 그것의 테두리 간의 동일한 밀도, 그리고 평면 내부에서 외부로 돌출하려는 미술가 자신의 이미지들이 갖는 서술적 메시지와 매체 전체의 규모를 포괄하는 화랑 공간과의 일치를 통해 시각적 매체를 환각의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것에서 그것은 가능해 보인다. 이재임의 창의력은 바로 이 점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VI.

이재임의 매체가 통합된 하나의 단위를 통해 환각과 실재 사이를 오가는 관람자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면 강성필의 관람자는 매체 속에 깃들지 않고 그것들을 애워싸고 있는, 실재하는 공간으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강성필의 관람자는 개별 매체들을 자유로이 둘러볼 수 있고 몇몇 극적 장치에 따라 임의대로 연상을 할 수 있다.

  도판 6
  강성필, "함축된 정원", 1997, 혼합재료, 
  1,500x200x2,500

이번에 설치되는 <함축된 정원>(도판 6)이 죽음의 의식인 매장과 관련된 서술을 시사한다고 한다.3) 또한 그는 그것을 “삶과 죽음, 위압과 자연, 위와 아래”와 같은 대립적 개념의 공존을 위한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4) 이와 같은 그의 언급과 의도는 다분히 자신과 무관한 관람자에게 의탁하는 효과가 가늠된다. 왜냐하면 그의 공간은 전적으로 지각 과정이나 그 단위들에 의존되지 않고 전적으로 미술가를 벗으난 관람자의 연민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람자가 그의 제작물을 보거나 그 이외의 지각적 체험을 통하는 것 보다 그의 제작물들을 한 번보고서 화랑을 나간 뒤나 그 관람자가 그 앞에서 눈을 감았을 때 떠올리는 것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것들은 미술가 자신의 의지와 의도를 대상화 되지 못했을 때 곧 잘 목격된다.

강성필의 관람자가 전적으로 미술가 자신과 동일시 되지 못하는 근원은 미술가가 현실에서 체험한 정서가 매체를 능가하려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의 매체가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나 공간을 창출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3) 강성필과의 대담, 1997년 9월 3일, 경기도 광명 
 4) 강성필의 작업 일기, 1997년 8월

 

나는 그의 매체에서 외관의 형식적 특질을 발견하지 못하고 만다. 단지 그의 매체들에서 점액질의 물리적 감각을 전달받는다. 그것은 젤리나 담백질 덩어리가 피부에 닿을 때 느껴지는 전율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생각하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의 정당성을 찾는다. 이와 같은 느낌은 지극히 임상병리적인 것으로서 고름, 피, 체액 그리고 그와 유사한 감수성을 지시한다. 그것들이 화랑 공간이나 그 이외의 특수한 영역에서 당당히 위치될 변형을 기대한다. 그럴 때 강성필의 관람자는 미술가와 미술가가 제조한 물건 간의 관계가 창출하는 특수한 장소에 위치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강성필의 화랑 공간에 반짝이는 그 전율을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많은 설칠물들을 나는 보지 못했고 그의 회화 제작의 과정을 염두에 둘 때 그와 같은 정서는 칠작업과 뚜렷한 맥락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VII.

 
강성필의 매체가 그 자체보다 관람자의 의도와 의지에 더 많은 기대를 갖는 것과 마찬 가지로 양진호의 매체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고 이들 둘 다는 개념을 매체로 삼지고 있지 않다. 강성필의 제작물이 화랑의 천정, 바닥 그리고 벽을 활용함으로써 상자 속 공간에 관련된 개방성을 띠는 것에 비해 양진호는 벽에 더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벽에 전적으로 의존되지 않는 채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탈>(도판 7)마저 벽을 재현한 구조속에 제작물의 알맹이들을 설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양진호의 작품이 회화의 관습과 밀접한 연관속에서 진화된 설치물로 본다. 소급해서 벽에 전적으로 의존된 <일탈>(도판 8)과 비교하면 그 표면에 층지워진 물감들은 거의 지구의 중력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이미 그린 이미지들을 점차 지워 가는 과정에 생겨난 자연스런 징표들이다.

도판 7
양진호, "일탈의 설치를 위한 정면도", 1997, 드로잉

이와 같은 외관들은 곧장 이 번에 설치되는 제작물(도판 7)에 무의식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것의 기둥들과 그 속의 애체에 떠있는 물질의 방향, 그리고 문자들의 정렬에서 수평과 수직의 구조는 동일하다. 여기에서 나는 양진호 회화, 혹은 구조물의 갖는 디자인의 명료함에 주목한다. 이와 같은 명료성은 한편 질료의 점성에서 유래하는 강성필의 구조물과 대조된다. 이와 같은 대비는 양지호의 매체를 건조한 특성으로 보이게한다. 그와 같은 건조함은 특히 그의 회화 작업에서 명도가 높은 채색에서 두드러진다. 심지어 그것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가루가 되어 날려갈 것만 같다.

여기에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조심스레 양진호의 제작물들에서 관람자를 끌고 또한 그를 위치 시키는 요소로 중력과 그것에 대응하는 힘의 방향 간의 마찰을 눈여겨본다. 나는 지금까지 그의 제작물들을 네 점밖에 보지 못했다.

 도판 8
 양진호, "일탈", 1997, 혼합재료, 132x161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94년에 제작된 두 점의 풍경이었다. 그것들 중 하나는 한옥의 전경이 사실적으로 재현된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웅덩이와 그것에 비춰어진 하늘의 풍경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 네 점의 작품들에서 중력과 그것에 대응하는 용출의 대립은 모두 적용된다. 내가 처음 봤던 가옥에 관한 주제는 인간이 자연 앞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고안한 기초로서의 의미로 보이고 다음 웅덩이와 하늘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보이는 물고기와 새의 세계이다. 이들 두 점 다는 그 속에 생명이 부재하는 환경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물과 하늘은 오염된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 부재의 공간에 남는 것은 물리적 작용들일 뿐이다. 그와 같은 물리적 작용이 다음에 목격하게된 작품들 간의 맥락을 연결하고 있고 이 번에 걸리는 그의 회화와 설치물들에 노출되는 것에서 나는 그렇게 가늠해봤다.


VIII.


이정혁은 자신의 회화에서 “분열과 전체성”이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회화 공간을 구성한다고 한다.5)

   5) 이정형의 작업 일기, (1997. 8.)

그는 이와 같은 제작 방식이 전통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고수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바람과 같은 비가식적인 것에 대한 체험을 담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이성과 감성 간의 교차 지점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결과물”들을 이끌고 자신은 그 방식을 즐기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정혁의 진술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진솔하고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언급들은 바로 관람자로서의 제작자의 위치를 찾는 과정을 지시한다. 그 것은 제작 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과 비판에 의해서 비로소 즐길수 있는 미술가의 태도 이다.

이정혁의 <기억-바람에 관한>(도판 9)은 그의 말대로 초기 모더니즘의 추상 회화가 같는 포맷을 유지하고 있다. 검고 얇은 그림 틀이 사용돼 있고 화면의 구성이 형상과 배경간의 계층적 관계에 의존돼 있다.

도판 9
이정혁, "기억-바람에 관한", 1997, 혼합재료, 130x172

그 뿐만아니라 다른 뽈리포니 구성원들에 비해 여전히 벽면에 얇게 밀착하는 캔버스 두께를 유지한다. 여기에서 나는 그의 캔버스들이 비회화적 요소들을 회화적 특성으로 번역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바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유래한다. 바람은 분명 쉽게 볼 수는 없지만 깃발의 휘날림이나 나뭇잎의 흩어 짐과 같은 사물의 움직을 통해 회화에서 충분히 가시화 되어왔다. 이정혁은 바람 그 자체에 이해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바람에 관한 “체험”에 더 많은 동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체험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목격된 복합적인 무엇이라면 그리고 가령 시각, 후각, 청각과 같은 단순한 감각 단위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체험은 문학에 훨씬 더 가깝다. 복합된 삶의 체험들, 그는 그것을 회화적으로 번역하고 있고 자신을 그 과정의 장치로 활용하는 즐거움을 즐긴다. 이점은 강성필의 제작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방식면에서 강성필의 과정이 드라마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정혁은 시 창작의 방식에 접근해 있다. 이정혁의 말대로 그 “결과물” 앞에선 관람자의 위치는 체험을 재현하는 것에서 화면 내부를 향하고 있다. 그 곳은 바로 회화적 상상력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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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뽈리포니의 미술가들이 제시하는 공간에서 간람자의 위치에 따라 그들이 경험하고 비판하는 매체의 다양한 변화들을 살펴봤다. 개별 단위들의 교란과 미술가의 계획된 설계 사이에 위치하는 이종필의 관람자는 존재론적 자각의 알레고리를 창출하는 매체를 경험한다. 독립된 개별 단위의 이미지와 실재하는 공간이 마찰하는 장소에 위치한 권정준의 관람자는 불연속성의 매체를 통해 지각의 조건을 고찰한다. 그런가 하면 이연수의 관람자는 구축적이고 견고한 외관의 성격과 가변적인 외관의 성격 사이에서 특질이 변화하는 매체를 목격하게 된다. 박성호의 관람자는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에 대한 믿음이 갈등하는 지점에 서서 진실의 허구를 체득하게 된다.

한편 진실의 허구를 같이 탐구하는 이재임의 관람자는 환각과 진실 사이의 혼란을 정교한 수공적 장치를 통해 해소한다. 강성필의 관람자는 아직 위치를 정하지 못할 정도로 공연이 진행 중인 무대에서 열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매체는 육체에 관한 원초적 경험들을 알려준다. 양진호의 관람자는 중력의 물리적 힘과 그것에 대항하는 힘 사이의 갈등에 위치하고 건조하고 쾌청한 대기로 향해 있다. 끝으로 이정혁의 관람자는 회화의 세계와 삶의 세계 간의 대조에 위치하고 해맑은 시를 즐긴다.
걸리버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여행에 관한 겸양의 미덕이라는 특질도 얻었다. 반면 뽈리포니의 구성원들은 아직 그들의 여정을 멈추지 않은 채 매체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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