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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자를 회복하는 공간 : 신주혜의 매체


학예기획실   /   2007. 4. 20.
 

관람자를 회복하는 공간

        신주혜의 매체





이희영, 미술평론가, 인천대학교겸임교수



신주혜가 화랑공간 전체를 단독으로 자신의 매체로 구성해 보이기는 4년만의 일이다. 2003년 국내에 처음으로 그가 소개되었을 때(아르코미술관, 서울) 그의 설치물들은 죄다 벽면과 바닥에 부착되었고 멈추어 선 위치에서 조명되었다(참고). 정지된 단편들이 보는 이를 향하고 그 사이를 오가는 관람자의 경험은 매체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지금 갤러리토포하우스에서 전시되는 그의 매체는 움직이는 그림의 채용과 함께 관람자의 경험까지 포함한다.

이 변화는 매체를 마주하는 조건과 그렇지 않는 조건의 명확한 구분을 없애는 것에서, 그리고 화랑공간을 서성이는 동선까지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로 삼는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A]symmetry No.1; "발걸음" 버전

        projection, sound, wood frame, 1,800x1,600
방문자는 신주혜가 마련한 일련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 관람자로 변하고 뭔가를 찾아 버전들을 옮아가는 여행을 화랑공간에서 하게 된다.



                                                                         …

주어 찾기

이 전시장의 현관을 들어서는 방문자는 낡은 액자 속 평면에 자신의 걸음걸이의 사정(episode)을 처음 접하게 된다. 걸음을 옮겨 화랑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발의 모습이 뚜렷이 초점 맞춰졌다 이내 흐려지고 동시에 타인의 발자국 소리들이 올린다. 여기서 그는 짧게 초점 맞추진 좀 전의 순간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발걸음"버전,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람자의 발이

          투사되는 모습
왜냐하면 그 순간이 타인의 발자국 소리들 속에서 방문자 스스로 자신을 정확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관람자가 된다. 관람자는 매체를 통해 자신을 각성하는 사람이다. 방문자가 삶의 익숙한 습관으로 매체 앞을 그저 스쳐 지나거나 매체를 통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관람자가 못될 것이다.



관람자는 화랑 공간 한 가운데에 알처럼 도사리는 공을 보게 된다. 그 표면에는 몇몇 단어들이 쓰여 있다. 관람자는 공을 굴리거나 주변을 돌면서 그 표면을 세세히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제시된 단어와 동일한 색의 반대말을 대척점(對蹠點)의 표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발견한 단어는 예상한 반대말과 다르다.

[A]symmetry No.2, "반대어"버전, adballon, stickers,

   2,800x2,800
“믿음”이 “불신”아닌 “의심”으로, “동정”이 “무정”이 아닌 “무관심”으로, 그리고 “폭력”이 “비폭력”이 아닌 “대화”로 확인된다. 관람자는 보편적 믿음과의 차이를 발견했음에도 그것은 반대의 뜻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통상적이고 사전적 의미의 반대말이 대개 “비(非)”, “불(不)”, “무(無)”와 같은 접두어로 가능한 것이고 보면 공의 표면에서 발견되는 반대말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신주혜의 매체가 제시하는 반대말은 통상적 의미보다 적극적이다. “불신”보다 “의심”이 더 적극적이고 “무정”보다 “무관심”이, 그리고 “비폭력”보다 “대화”가 더 적극적이다. 이러한 적극적 반대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주어를 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능동문에서 진술

"반대어" 버전에 선택된 어휘들

의 주체는 주어이기 때문이다. 그의 표면에 새겨진 단어는 곧 그것을 읽는 이에게 주어를 각성케 하고 그 주어는 곧 “나”임을 깨닫게 한다.





과거의 환기



화랑의 입구와 공이 명확한 영역의 경계를 갖고 있지 않고 실재하는 공간에 그대로 노출된 반면 “염소가죽”버전은 조각의 전통을 따르는 좌대를 그리고 “김병호 씨의 머리”버전은 영상물을 현실의 삶과 구별 짓는 전통적 틀을 갖고 있다. “염소가죽”버전은 신주혜가 오래 전 북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구입한 몇 점의 염소 가죽에다 천이나 솜과 같은 내용물을 채우고 다시 기운 것이라고 한다.

     [A]symmetry No.3, "여소가죽"버전, 염소가죽,

            인조면, 85x30x50

여기에는 가죽의 필요에 의해 도살된 염소의 과거와 미술가에 의해 재생된 그 표면을 응시하는 관람자의 현재가 있다. 도살되기 전 산 염소에서 발견되는 대칭, 조화, 그리고 균형은 자연의 목적을 일깨운다. 목과 사지의 일부가 잘린 염소의 가죽 또한 그러하지만 상업적 목적에 의해서이다.



신주혜는 예술적 목적으로 사라진 염소의 형태를 복원했지만 대칭이나 조화, 그리고 균형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국 미술가는 이들을 “비대칭”도 아닌 “왜곡”으로, “부조화”도 아닌 “흉물”로, 그리고 “불균형”도 아닌 “과장”으로 마무리하고 만다. 미술가는 왜곡되고 흉물스러운 과장된 양감이 예술의 포맷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것의 대칭이나 조화, 그리고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부차적인 가공이 요구된다. 하지만 미술가는 이 지점에서 충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작을 희생했다.

          [A]symmetry No.4, "김병호 씨 머리"버전,

             싱글채널비디오, PDP 00:02:

                                        동영상 보기

  

“김병호 씨의 머리”버전에서 정면을 향한 인물은 얼핏 대칭되고, 이목구비가 조화롭고 그래서 균형 잡혀 보일 법한 외관이다. 그 남자는 얼굴을 돌려 이러한 사실을 다른 측면의 방향에 확인시키기는 동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박 깎은 그의 머리가 확대될 때까지 그는 표정이 없고 침울한 수동적 모습을 유지한다. 간혹 끔벅이는 눈은 남자의 수동성을 더욱 강조해 보인다. 더 나아가 확대된 그의 머리 표면에 끝내 “Asymmetry”(불균형)이라는 문자가 각인되어 돋아난다. 하지만 그를 그 지경으로 이르게 한 힘이나 그 원인의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미술가는 충분히 그 원인을 밝히거나 암시할 연출을 가졌을 것임에도 그것을 희생했다.



[A]symmetry No, 5-1, "수도꼭지"버전, 싱글채널비디오, 프로젝션
희생은 신주혜가 자신의 매체에서 실현하는 고백의 방식이기도 하다. 예술적 의도로 정당화될 여타의 가공을 포기함으로써 미술가가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 관람자에게 희생에 의해 부재하는 부분을 채울 기회를 제공한다. 그 남자를 그렇게 만든 원인은 바로 그 앞에 서 있는 그대(you)임을 암시한다. 염소가 최소의 모습으로 복원되지 못한 것 또한 그 앞을 서성이는 바로 그대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매체 표면의 수동성은 관람자가 뭔가를 행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윤이 흐르고 숱이 짙은 털과 머리카락이 있었던 과거에서처럼 그 표면은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공에 의해 제거된 분명한 징표들이 화랑 공간 곳곳에서 고립된 채 사람의 작용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여기



“염소가죽”과 “김병호 씨의 머리”가 지나가 버린 것과 남는 것에 관한 기록이라면 “수도꼭지”버전과 “흔들리는 얼굴”버전은 지금 곧 벌어지고 관찰되는 순간에 관한 통찰을 제시한다. “수도꼭지”버전은 현실에 실재로 사용되는 두 개의 수도꼭지와 투사되는 영상물들로 결합되어 있다.

[A]symmetry No.6, "흔들리는 얼굴"버전,

      싱글채널비디오

                            동영상 보기
그 영상물은 공의 표면에 기록되었던 단어가 거의 완성되는 순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의 개입과 동시에 사라진다. 이는 곧 생성되려는 순간 소멸되는 연속된 반복을 보인다. 관람자는 문자가 완성되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그 문자를 이미 알 고 있다. 관람자가 분명히 목격하는 것은 문자의 파괴이지만 그는 이미 그 뜻을 안다. 현실에 실재로 진행되는 생소한 경험 앞에 관람자는 과거에 학습된 개념을 꺼낸다.



“흔들리는 얼굴”버전은 미술가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이 버전은 셔터가 끊어지는 간격보다 더 빨리 움직인 얼굴을 여러 장면 출력하여 한 화면에 연속적으로 재결합한 것이다. 그 결과 얼굴은 뭉개진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들이 한 곳에 모여 나타나는 공동된 잔상은 실재하는 미술가를  봐온 경험과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신주혜는 이 모습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임을 기꺼이 주장하고 그것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를 알고 있는 동료는 뭉개지고 찌그러진 장면의 인물을 생소한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분명 현실에 있었기에 사진기에 기록된 것이다. 과거로 요약되는 일관성과 현실에 실재로 전개되는 생소한 경험이 여기서 충돌한다. 이 두 버전에서 목격되는 생성과 소멸의 교차 그리고 과거의 믿음과 현실의 사정 간의 충돌은 화랑공간에서 관람자에게 인식론의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이가 자신의 현재를 과거와의 대비를 통한 차이에서 그리고 공 앞을 서성이며 반대말을 찾던 이가 자신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과 새로 발견되는 단어 간의 차이에서 자신의 신념을 제고하게 되고 새롭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관람자가 된다. 신주혜의 매체가 관람자를 그것에 주목하게 하고 화랑공간 곳곳을 여행하게 하는 것은 그 차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매체에 개입할 기회를 갖는 한편 과거에 유래하는 보편적 믿음을 요약하고 재고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가 하면 신주혜는 희생과 고백의 방식으로 자신의 매체를 창출하고 그 결과 실내 공간에 각각 고립된 개별 매체의 기다림이 사람의 온기를 기다리는 포맷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관람자는 스스로 미술의 일부가 되거나 그것에 관여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염소가죽의 표면을 어루만지려 하거나 “김병호 씨의 머리”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할 것이다. 고백이 제작의 공정에서 미래의 각색을 포기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화랑공간에서는 과거에 관한 것이다. “수도꼭지”버전이나 “흔들리는 얼굴”버전에서처럼 믿음은 현실 앞에 끊임없는 도전에 놓인다. 여기서 관람자는 새롭게 겪는 현재의 경험을 통해 통상적 믿음이 과거의 지속임을 깨닫는다. 이들 일련의 각성장치들을 통해 관람자는 시각매체가 제공하는 인식론의 여행을 화랑공간에서 체험하게 된다. 이 여행의 목적은 바로 나를 찾는 것이다. 신주혜의 매체는 그 각성의 경로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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