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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이세우 회화에 나타난 아이러니의 복구


이희영   /   월간갤러리가이드 1997. 8월호   /   1997. 1.

네거티브 평면의 환각과 캔버스 바탕의 실재 사이

    이 희 영 (서울대 조형연구소 연구원) 


화가가 실물의 사과를 보고 그것을 물감으로 재현할 때, 그리고 완성된 그 그림을 관람자가 눈 여겨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특정의 영역이 여타의 영역으로 다르게 해석되는 변형이 목격된다. 현실의 영역에 실재하는 사과가 화가의 회화적 해석 영역으로 옮아가고 화가에 의해 재현된 회화 표면의 물리적 영역에 속하는 물감들이 관람자의 마음으로 통합된다. 이들 작용은 현실에 실재하는 물리적 영역과 상상이나 미학적 판단과 같은 마음의 영역간의 관계로 요약된다.


   도판 1
   이세우, 매듭풀기-비오는산 I,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x30x9; 100x21x9

1997년에 선보인 이세우(李世雨)의 회화들이 그의 과거를 특징짓는 회화들과 맥락에서 뚜렷한 대비와 함께 일관성을 갖는다면 그것들은 그의 과거로부터 옮겨오고 변화된 징표들을 가질 것이다(이 전시회는 같은 해 1월 22일에서 28일 사이에 서울의 공평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다). 개인으로서의 이세우가 유지하는 미술가로서의 경력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고와 서로 상반된 영역들간의 통합에 대한 소산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에 제작된 이세우의 작품들이 들어내는 형식적 특생은 상이한 영역들 사이의 변형에 관한 암시들을 품고 있을 것이다.



I.


이 전시회는 1996년에 선보인 “혼돈 속의 자유”연작 이후 1년여의 제작 기간을 경과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도판2
    합판에 복합매체, 1994,
    합판에 복합매체, 155x55

“혼돈 속의 자유”들의 말기에 해당하는 소수의 작품들과 함게 “매듭풀기”연작으로 화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변화들을 1997년의 개인전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들 변화는 크게 칠(painting)의 특질과 회화 전체의 모양새가 바뀌는 형식적 변형 뿐만 아니라 혼돈에서 해결로 바뀌는 주제의 변형으로 간추려진다.


이 변화들 중에서 최근의 연작, “매듭풀기-비오는산 I.”(도판1)은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감지된다. 이 그림에서 일견 수묵화의 산수를 연상시키는 검정색 형상들의 스며듦과 그것에 대조되는 배경의 여유로움은 캔버스 전체를 도료로 뒤덮은 다소 폐쇄적이고 따라서 물감의 물질성에 의존된 과거의 공간적 특징들과의 동질성을 상실하고 있다. 피렌체에서의 첫 개인전(1994년)에서 작년의 두 번 째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이세우의 칠은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두텁게 꽉 채워졌다.

첫 개인전에 제시된 “화판에 복합 매체”(도판2)에서 칠은 회반죽으로 마감질 된 벽면의 낙서들과 그 표면을 재현한 듯한 직접적인 드로잉들로 보증되었다. 더욱이 물감 방울들은 총총이 겹쳐져 흘러내리게 처리되었다.

도판 3
마음 속에...I., 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45.5x53

여기서 두터운 칠의 평면은 신체의 표현적 제스츄어를 고스란히 들어내면서 견고한 각목의 틀과 문자들이 채용됨으로써 실재하는 대상의 등가물이 되려 했다. 그런가 하면 두 번 째 개인전에 걸린 “마음속에...I.”(도판3)에서 칠된 평면은 두터운 표면이 여전히 유지된 채 단색조의 화면을 구성했다. 단지 첫 개인전의 것과 달라진 점은 칠이 비교적 엷어졌고 넓은 면적을 긁어냄으로써 곳곳에 바탕이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외관을 유지한 징표이다. 과거의 두 전시회에 걸렸던 이세우의 회화가 갖는 물리적 특성은 견고한 그림틀 내부의 평면에 한정되었다.


그것들과 대조적으로 최근의 “매듭 풀기”연작은 이미 칠된 넓은 면적들을 점차 지워 가는 공정과 흰 캔버스의 바탕에 붉은 안료가 스며들게 하는 발묵(發墨)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가령 “매듭 푸기-야경 I.”(도판4)에서 검정색의 칠이 사각형 네 가장 자리에 중심을 두고 있고 화면 가운데가 지워져 있다. 엷고 투명한 색조가 검정색의 면적들과 흰 바탕 면 사이에 실재하는 캔버스의 천으로 스며들고 있다.
도판 4
매듭풀기-야경 I.,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39x77x15
그런가 하면 “매듭 풀기-물 고인 자리 I.”(도판5)에서 검정색의 얼룩들은 그 가장자리에서 바탕으로 흡수되는 흔적을 남긴다. 그 결과 회화 표면을 뒤덮은 물감의 물리성이 제거되는 빈자리는 시각적 대상이 부재함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관람자는 회화 그 자체의 비물질성 앞에 노출된다.

이처럼 최근의 회화들에서 목격되는 여백의 허용과 발묵의 스며듦은 이세우 회화의 변화된 외관 뿐만 아니라 칠의 특질을 대리한다. 화면 전체를 둔탁하고 두터운 칠로 채우던 외관에서 점차 실재하는 캔버스의 바탕을 허용하는 이들 변화의 사례를 통해 볼 때 현실에 실재하는 회화의 고립된 본질에 대한 이세우의 아이디어가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도판 5
   매듭풀기-물고인 자리 I.,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x61x9; 81x16x9

이세우의 회화에 있어서 삶과 대조되는 회화의 순수한 영역은 과거에는 도료와 그것을 혼합하는 액체의 질퍽한 물리적 포맷을 더 강조하게 된다.


견고한 틀로 경계 지워졌던 칠의 면적만으로 회화의 영역을 한정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 이세우의 회화는 그것의 틀이 부재하고 벽으로부터 심하게 돌출됨으로써 그 영역이 벽면을 포함하는 실재하는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캔버스 내부의 이미지들을 결정짓는 칠 뿐만 아니라 캔버스 전체의 형태가 변화된 것은 회화 공간에 대한 이세우의 전환된 아이디어를 논증한다. 과거 이세우의 회화들이 사각형의 평면에만 국한됨으로써 어두운 배경과 밝은 형상 간의 대비가 야기하는 시각적 반응들에 전적으로 의존된 반면 최근 그의 회화들은 칠되지 않은 캔버스 바탕과 캔버스 전체 형태의 물리성에 대한 강조로 관람자의 생활 공간과 회화 표면의 환각적 공간간의 마찰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여러 겹의 층진 도료로 화면을 막아 버리는 불투과성의 강조에서 발묵으로의 전환은 결국 캔버스 표면의 올과 텍스츄어를 노출시킴으로써 화면을 비물질화 시킨다.

   이세우, 혼돈의 자유-매듭풀기를 위한 에스키스들
따라서 관람자는 화가가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이미지나 제스츄어의 흔적이 야기하는 시각적 효과에만 이끌리지 않고 회화 표면과 관람자의 시선이 마찰하는 비물질화된 특수한 영역에서 자유로운 상상이 허용된다. 이제 회화의 영역은 직사각형의 테두리에 한정되는 그 내부만이 아니라 회화의 표면과 관람자 사이의 화랑 공간(gallery space)으로 변형된 셈이다.

이와 같은 화랑 공간에 대한 주목은 이세우만의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미국에서 그것에 관한 극단적인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미니멀 미술(Minimal Art)의 표면이 불투과적인 물질성의 표면에 의존해서 벽면과 대등해졌던 반면 이세우의 변화된 공간에서 칠은 오히려 표면의 투명성으로 캔버스 그 자체의 물질성과 이웃의 벽면을 동일시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캔버스 전체의 대상성을 강조한 미국 미술에서 회화의 표면이 벽과 두드러지게 대조됨으로써 실재하는 화랑 공간을 창출했다면 이세우의 회화에서 표면은 벽과의 경계를 파괴함으로써 그 내용물들이 실재하는 공간에 녹아든다.



II.


이 점에서 나는 이세우 회화가 전적으로 감각적 영역의 어휘나 형식론으로 판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세우의회화는 캔버스 자체의 물리적 속성을 갖는 점에서 현실에 실재하는 오브제로 비춰지고 역설적으로 도료의 물질성을 제거하는 점에서 대상화될 수 없는 영역을 포괄한다. 이 상이한 영역이 동시에 한 자리에 공존하는 아이러니는 미니멀리즘의 오브제 미술로부터 이세우의 것을 구별되게 한다.

     도판 6       옹알이, 캔버스에 유채
아이러니는 매체로 방향 설정된 형식주의적 관점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비예술적 요소이다. 특히 현대 미술의 발전적 맥락에서 아이러니는 비시각적이고 반조형적인 감각을 대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아이러니는 연속되는 흐름인 시간을 매체로 한다. 시간의 매체인 문학과 음악에서 아이러니의 특질은 독자나 관객의 의식 속에 지속되는 연상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한정되고 영국적인 장소인 공간을 매체로 하는 회화에서 더욱이 매체의 고립을 향한 회화의 진보적 전개에서 시간에 종사하는 아이러니나 연상은 철저히 제거되어 오는 과정을 갖고 있다. 현대 미술에서 회화의 질을 들추어 낼 때 문학적 연상과 서술적 아이러니는 이런 점에서 공간의 독자적 특질을 방해하는 것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세우에 있어서 아이러니는 여러 시기에 걸친 회관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에서 지속되는 특징으로 보인다. 특히, 밝은 흰색이 전경의 형상으로 구실 하는 칠의 습관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이세우, 매듭풀기-백사장

제 2회 개인전에 걸렸던 “옹알이”(도판6)에서 간헐적인 흰색의 필치가 여타의 색면에 대조되어 있다. “성스러운 잉태”(도판7)에서 휘갈겨진 드로잉들의 두드러짐은 화면 전체의 색조에 대해 뚜렷한 제스츄어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최초의 개인전을 구성했던 “화판에 복합 매체”에서 흰색 십자가 형태는 관람자의 시선과 가장 먼저 충돌한다.

최근의 회화들 중 “매듭 풀기-비오는 산 I.”에서 흰색의 이미지는 언뜻 발묵으로 칠된 검정 색의 형상에 대조되는 배경으로 보이고 그것은 칠되지 않은 캔버스의 바탕으로 대체된다. 여기에서 흰색은 과거의 칠이 지워진 결과이다. 지금까지 이세우는 자신의 회화에서 어두운 색조나 검정 색을 배경으로 삼고 그 위에 밝은 형상이나 흰색의 대조되는 이미지로 구성해왔다.

    도판 7
    성스러운 잉태, 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72.2x60.6

어두운 색이 화면의 가장자리에 중심을 잡는 것에서 배경은 과거의 회화들에서나 현재의 것들에서도 밤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은 밝음을 회화의 바탕으로 제작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색을 초벌한 조건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즉 회화 평면의 조건과 삶의 조건에 대한 이세우의 아이디어가 네거티브의 세계에 기초되어 있음을 이 조건은 논증한다.


밝은 배경에 대조된 어두운 형상의 세계는 낮에 목격되는 세계의 조건이다. 이와 같은 배경의 조건은 미술에서 통상적이다. 특히, 인상주의 이래로 현대 미술에서 회화 공간에 대한 포지티브로서의 탐구는 감각과 물질의 의미를 강화했고 이 점이 회화의 영역과 삶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분리시켰다. 따라서 미니멀 미술에서 작품은 밝은 삶의 세계에 각인되는 현존성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이세우의 회화가 기초되는 바탕의 네거티브 공간은 개별화된 감각들이 융합하고 삶의 조건과 회화 영역의 고립을 와해시킨다.

최근 이세우의 회화에서 관람자를 위치시키고 그의 마음으로 회화의 외관이 통합되게 하는 경로는 바로 이 네거티브의 회화 평면과 칠되지 않고 실재하는 흰 바탕의 캔버스가 잦는 물질성 간의 마찰에서 작용한다. 이와 같은 기능이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는 영역들간의 마찰에 관계하는 점에서 그것은 바로 이세우 회화의 변형 구조이다. 관람자는 여기서 혼란스런 마찰을 극복하고 정제하려는 노력으로 시각적 단위들을 자신의 의식으로 중재하고 통합한다. 따라서 이세우의 회화는 물리적인 감각 단위로 대상화되기보다 오히려 관람자의 상상력과 연상을 허용하는 의미론적 대상으로 보인다.


이세우, 매듭풀기-물 위의 점들과 풍경 I.,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93x20x15; 93x20x15



앞에서 살펴봤듯이 지난 3년 동안 다양한 외관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일관된 이세우 회화의 변형구조는 네거티브로 해석되는 회화 평면과 실재하는 캔버스의 물리성 간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랑 벽에 걸려 있는 이세우의 회화 표면과 관람자 사이의 특수한 환경은 바로 그 상반되는 회화 외관들이 관람자의 눈을 끌어들이고 관람자는 자신의 마음으로 혼란스런 외관들을 통합한다.

이러한 일련의 특수한 변형 절차에서 이세우의 회화는 새로운 화랑 공간을 창출한다. 이세우의 화랑 공간이 전적으로 화가의 주장이나 의도를 위한 수단의 매체로 다루어지지 않은 점에서 그렇다고 그것이 매체의 본질만을 위해 감각적 형식이나 대상에만 머물지 않은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관람자의 상상력과 연상을 허용하는 발묵과 네거티브 평면의 기능적 역할을 하는 점에서 나는 감각적 대상성으로 경도된 현대 미술의 경직된 당위론을 해소할 의미론적 단서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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