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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미술 현장의 동향과 평가 / 미술 감상 안내   
밝은 빛 아래 목격되는 사색의 통로: 1990년대 최의순 조각의 화랑공간


이희영   /   서초조형예술원개관 기념초대전 도록   /   1999. 3. 1.

 

이글은 다시  「포유」, 도서출판 첫열매(2000. 11. 11.)에 실렸다. 


 

   이 희 영

미술평론가 / 서초조형예술원 학예․교육실장


1999년 3월 서초조형예술원의 개원 기념전에 조각가이자 미술 교육자인 최의순이 초대되었다. 그 전시회는 시민들의 문화 복지를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의 개원에 따른 특정 지방자치 단체의 기대, 그리고 일반 시민 대상의 조형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교과의 확대된 연구 활동을 그곳에서 펼칠 것에 대한 특정 대학의 기대, 이 둘 다가 동시에 결합된 기획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제작실에서의 최의순

거기에는 최의순이 서초구의 인접 지역에서 오래 동안 창작 활동을 해 왔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30여 년간 조형예술을 가르치며 연구해 왔다는 지엽적 의미를 능가하는 특색이 있다. 최의순이 평생 왕성한 제작 활동을 통해 다양한 창작물을 생산해 왔음에도 좀체 외부에 대해 자신의 작품들을 애써 공개해 오지 않았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전시회는 최근 한국 조각사의 중요한 고비에서 조형적 사고와 제작을 지속해 온 한 조형 예술가의 완숙한 제작물을 접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가 되었다.



그 전시회는 ①다소 얇고 평평한 면의 한 덩어리가 가는 다리들로 좌대를 버티고 선 버전(도판 1), ②두 개의 얇고 평평한 면들이 넉넉한 공간을 품은 채 서로 맞닿아 좌대 위에 서 있는 버전(도판 2), 그리고 ③마주한 면들 간의 틈이 사람의 손을 넣어보기에 불편하고 오직 주변의 빛만이 그 속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버전을 포함하는 연작(도판 3)으로 진열되었다. 이 작품들은 그의 최근 10년간의 시기를 특징짓는 흰색 석고 조각들로 구성된 것들이다.

   도판 1 최의순, "빛", 1994, 석고, 45x24x60

석고는 조각가들에게 기본적이고도 친숙한 재료이다. 대개 성형의 한 공정이나 대작의 밑 작업을 제작하기 위한 용도와 다루기 손쉽고 본뜨기에 용이한 이점 때문에 석고가 조각가들 사이에 오래도록 곧잘 활용되어 왔다. 그에 비해 석고는 영구성의 부족으로 본격적이고 완성된 작품에는 걸맞는 재료로 취급되지 못한다. 이처럼 본격적인 작품 제작에서 도외시된 재료를 통해 최의순은, 1990년대에 들어서 완성된 조각품으로 기꺼이 화랑공간(gallery space)에 제시하고 있다
.



현대의 화랑공간 대부분은 일상과는 판이한 환경으로 목격된다. 그것은 새 하얀 밝은 벽면들로 구성된 실내 공간이 삶의 기능과 무관해 보이고 관람자의 일상에 기여를 할 것같이 않는 물건들을 포함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건축의 실내에서 일상의 기능을 제압하는 곳이 신전이나 성소의 내부였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현대의 화랑공간은 신전의 신상을 미술품으로 대체하고 관람자의 현실 감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실내 디자인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화랑은 가구와 창과 같은, 시각적으로 불필요한 모든 것이 제거되고 심지어 시간의 정지가 가정된 공간으로 발전해 왔다. 그처럼 관람자를 주눅 들게 하는 공간의 개발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가장 현저했고 그를 통해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새 하얀 석고 조각물들이 흰 대좌에 띄엄띄엄 위치되도록 진열된 최의순의 화랑공간은 작품 자체가 화랑 벽면과 동일한 색임에도 불구하고 신성하고 고상한 현대미술의 위압감을 관람자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람자는 최의순의 해 밝은 공간을 통해 조각의 흰 표면에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남은 손자국의 온기와 그것이 서린 표정들을 좌대와 좌대 사이를 오가며 판독하고 점차 넉넉한 위안을 얻는다.

      도판 2
      최의순, 상(象), 1996, 석고, 55x100x50
여기서 나는 최의순 조각이 창출하는 화랑공간의 한 특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전문조각가로 출발하던 때에 그가 현대 조각에서 충돌과 대립의 상반된 요소의 갈등에 대한 통찰이 최근 ’90년대의 석고 조각에서 종합되는 것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최의순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60년대 중, 후반 국전을 통해서이다. 그 때 미국을 포함한 현대미술의 중심에서는 조각도 아니고 회화도 아닌 특정의 물체가 제작되기까지 할 정도로 화랑공간에 대한 시각적 실험이 극단적으로 진행됨과 동시에 움직이는 조각이 제작되고 있었다. 당시 최의순은 제작자의 의지와 의도를 강조한 표현적인 조각의 완숙한 과정을 일련의 인체 제작을 통해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는 조형예술의 본질적인 조건을 의식했다. 최의순은 “현대조각의 과제”라는 논문(「서울미대 교지」, 1968)에서 “작품의 세계와 이를 감상하는 사람 사이”의 부조리를 주목했고 “형체형성”이라는 에세이(「이화여대 교지」), 1970)에서 “보는 것과 느끼는 것과”의 불일치에 주목했다. 그는 이와 같은 부조리와 불일치를 극복 혹은 능가하는 것에 조각이라는 매체가 예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글에서 최의순은 제작자의 의지가 조각이라는 시각 매체를 통해 관람자에게 감상되어야 한다고 현대조각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요약했다.



작품의 세계와 관람자의 세계,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이 상반된 선택 국면은 당시 주도적인 현대미술의 과제였다. 여기서 최의순은 조각이 감상의 조건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 조건의 추구를 통해 이후 1970~’80년대를 일관되게 실험해 왔다. 최근 화랑들에 제시되는 입체물들이 간혹 혹은 대부분 실내의 모든 조명을 어둡게 설정하고 몇몇 특정의 설치물에 좁은 면적의 조명을 비춤으로써 조명이 투사된 작품들 간의 어두움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관람자는 시각적 조건보다 극적 연상에 더 많은 감상을 의존해야 한다.

최의순, 97상(象), 1997, 석고, 155x50x70

그 어두움은 만화에서 장면과 장면사이를 한정하는 종이의 여백이 시간의 경과를 관람자가 연상하도록 하는 역할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 이와 같은 경향은 시각 매체의 다원화와 확대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매체는 조형예술이 전적으로 공간이 아닌 조명 혹은 어두움으로 둔갑되고 관람자의 자의적인 연상에 의해 보이는 것들이 조작된다. 이와 같은 실태는 몇몇 설치 미술에 대한 오해에서 유래된 최근의 경향들이다.


이에 비해 최의순의 매체는 전적으로 밝은 빛에 의존하고 있고 공간에 의존하고 있다. 조각이 공간을 한정하고 공간을 창출하는 한, 시각 매체일 수밖에 없음을 그의 석고 조각은 논증하고 있다.
도판 3   최의순, "빛", 1997, 석고, 75x74x25
비록 그것이 투명한 시각과 공간을 매체로 하지만 전적으로 관람자의 연상을 미니멀 미술(Minimal Art)에서처럼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형태를 공간에 복원함으로써 관람자의 시각적 연상을 더 풍부하게 하고 있다. 미니멀의 제작물은 제작자의 손자국과 같은 체취를 제거함으로써 작품의 세계와 관람자의 세계, 이양자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킨다. 결국 미니멀 미술품이 진열된 1960년대 말의 밝은 화랑공간은 시간의 순간성과 투명함을 획득하였지만 조형 예술을 비가시적인 환경의 부속물로 만들고 말았다. 서초조형예술원의 개관 기념전에 진열된 최의순의 첫 번째 버전은 바로 이러한 밝음을 최대한 수용함과 동시에 시각적 견고함을 유지하는 사례가 된다.



어두움과 개별적인 조명에 의존된 최근의 설치물들이 팅걸리(Tinguely)에 대한 시간과 연상의 개념을 확대, 발전시킨 결과로 볼 때 팅걸리에 대한 1960년대 최의순의 시각은 독특하다. 최의순은 팅걸리가 제작한 조각의 움직임을 칼더(Calder)의 것과 변별하면서 가상적 양감(virtual volume) 개념에 주목했다. 어두움 즉, 시각의 부정에 의존한 상상력 보다 시각의 밝은 빛 아래에서 목격되는 상상력에 최의순은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최의순, "빛", 1994, 석고, 86x15x78

따라서 최근 진열된 최의순의 두 버전은 관람자의 위치이동에 따라 양감이 두 개로 혹은 하나로 통합되는 움직임의 조건을 허용함과 동시에 그 어두움을 극복하고 있다.


세 번째 버전은 작품 자체가 외부의 조명으로부터 연관되지 않는 또 다른 조명 장치를 통해 앞의 두 버전의 작용을 한 양감에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 버전은 첫 번째 버전과 함께 양면 부조의 조건으로 앞과 뒤가 대등하게 관람의 관찰대상이 되도록 기획되어 있다. 이는 움직이는 관람자의 시선에 따른 감상의 자유와 석고의 재질을 가까이 목격되도록 한 계획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계획은 조각의 앞뒤가 관람자의 감상에서 통합됨을 암시한다. 세 번째 버전은 앞뒤의 통합뿐만 아니라 안과 속의 통합도 이룩하고 있다. 여기서 관람자는 광원이란 항상 작품의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인식해 온 통념이 깨어지는 새로운 광원을 작품의 내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버전들은 밝은 빛 아래 관람자라는 시각과 비평의 주체와 석고라는 물질 그리고 조각가라는 제작의 의지가 한 곳에 통합되는 경로를 갖고 있다. 그 통합은 서로 생소하고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요소들이다.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으로 가려지는 통합이 아니라 해 밝은 시각적 공간에 노출됨으로 서로 충돌하고 제각각의 성격들이 고스란히 고백되는 최의순의 화랑공간에 있다. 여기서 각자는 충돌과 노출을 통해 자신의 모습들을 회고하고 돌이키는 체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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