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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화가: 김병종의 회화적 기행


학예기획실   /   갤러리현대 제공   /   2008. 3. 19.
 

길 위의 화가

           김병종의 회화적 기행



이 주 헌, 미술평론가


길에서 길을 묻는다. 길을 묻는 것은 단순히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의 지리적인 경로를 묻는 것이 아니다. 풍경을 묻고 사람을 묻고 인정을 묻는 것이다. 단순한 경로는 길이 아니다. 인생이 단순한 경로에 불과한 것인가. 성공이, 행복이 단순한 경로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경로를 따라가시라. 당신은 나그네가 아니다.

쿠바일기, 2006,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33.4x53


길을 떠난 이는 길을 만난다. 새 길을 만난다. 어제 걷던 길을 오늘 또 걷는다 해도 그 길은 새 길이다. 하늘빛이 다르고 바람소리가 다르고 마주친 사람의 표정이 다르다. 길을 떠난 우리는 늘 새 길로 접어든다. 길을 걸으면서 새로움에 떨고, 새로움에 웃고, 새로움에 울지 않는다면, 당신이 걷고 있는 곳은 길이 아니라 제자리다. 당신은 아직도 길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길이 단순한 경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길이 새 날과 새 기쁨을 여는 축복된 공간이라는 사실을 더욱 또렷이 인식시켜 주기 때문이다. 여행은 길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그렇게 벼려 준다. 그러므로 여행을 떠날 때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하고 감성이 남달리 풍부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여행의 가치는 배가된다. 진정 길다운 길을 걷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런 훌륭한 도반(道伴) 가운데 한 사람이 화가 김병종이다.


예인(藝人)들의 삶의 자취를 좇아 나라 안팎을 훑은 김병종의 『화첩기행』은 그가 이 시대의 뛰어난 길라잡이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꼭 그 책처럼 글로 길을 밝힌 것이 아니더라도, ‘바보 예수’ 연작,  ‘생명의 노래’ 연작 등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가 그려 온 그림들 또한 그가 얼마나 뛰어난 길라잡이인 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바보 예수’ 연작에서 그가 그린 것은 구도자(求道者)다. 구도자란 길을 구하는 사람, 곧 길을 묻는 사람이다. 김병종은 이 연작을 통해 스스로가 구도자며, 우리 모두 구도자의 운명 속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삶이라고 하는 게 끝없이 길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멕시코 기행, 2007,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97x162


‘생명의 노래’ 연작에서 그가 그린 것은 물고기와 새와 말 그리고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길동무들이다. 길을 걷노라면 만나게 되고 어우러지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그런 존재들이다. 생명은 상생(相生)이며, 홀로 삶이 아니다. 왜 수많은 신화와 전설, 동화와 우화에서는 길 떠난 사람이 반드시 길동무를 만나는가. 삶이 상생이기 때문이다. 김병종의 길동무들은 길을 묻는 행위가 결국 상생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림에서 길을 묻고 길동무를 만나 온 그가 이제  ‘길 위에서’ 연작을 시작한다. 한 십 년 족히 그릴 주제다. 이 연작을 위해 그는 앞으로 수다한 여행을 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문단의 주목 받는 소설가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의 반려 또한 이 길을 함께 걸을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에는 시인 김광균(金光均)의 「추일서정(秋日抒情)」에 나오는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라는 시구가 스쳐지나 갔다. 그처럼 강렬한 이미지의 그림이, 또 그처럼 인상적인 이미지의 소설이 함께 나올지 모른다 생각하니 왠지 스릴감마저 느껴졌다.


어쨌든 ‘길 위에서’ 연작을 계기로 김병종의 화포(畵布) 속 길은 이제 보다 또렷한 여행의 이미지를 띠게 됐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길이 원형으로서의 길, 본질로서의 길이었다면, 이제부터 보여주는 길은 그가 직접 좌충우돌하며 겪는 체험의 길이자 현실의 길이다. 물론 체험을 전하고 현실을 전한다 해서 단순한 표피와 인상의 나열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결국 그가 걷는 길들 또한 원형의 길, 본질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원형의 길, 본질의 길로 가기까지의 형형색색 여정이 본격적으로 형상화돼 실제 여행의 재미마저 세세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둥 폭포(1), 2007, 캔버스에 먹과 아크릴, 162.2x97

김병종의 이번 작품집에는 그가 라틴 기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 중 일부는 한 일간지에  ‘김병종의 라틴 화첩 기행’ 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함께 실은 바 있다. 어쨌거나 그의  ‘길 위에서’ 연작은 이렇듯 라틴아메리카를 그 시발점으로 삼았다. 왜 라틴아메리카냐고 묻지는 마시기를 바란다. 그것은 왜 피가 심장에서 출발하느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지구의 심장이다. 지구상의 그 어떤 땅이 라틴아메리카보다 더 뜨겁게 박동할까. 뜨거운 피의 여행이 심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김병종의  ‘길 위에서’ 연작도 라틴아메리카라는 뜨거운 심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라틴 여행 후 그의 붓놀림에 스며든 나라는 쿠바와 멕시코, 아르헨티나다, 브라질, 칠레, 페루 등이다. 거기서 김병종이 가장 강렬하게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색채였다. 고고한 예술가들이 공교한 예술품을 만들 때 구사한 색채가 아니라, 서민들이 집을 단장하거나 값싼 장신구를 패용할 때 선호한 색채들이다. 비록 키치적으로 다가오고 교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일지 모르나, 이 색채들은 그야말로 삶에서 우러나온 살아 있는 색채들이다. 물론 어느 사회에나 서민들의 색채는 존재하고 그 색채들이 강한 생명력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세상 그 어떤 서민의 색깔도 라틴아메리카 서민들의 색깔만큼 강렬하고 폭발적이지는 않다. 김병종은 그렇게 느꼈다.


붉은 피처럼 원초적으로 움직이는 그 색들, 보는 이의 눈뿐 아니라 심장마저 관통하는 그 색들을 마주하고, 누구보다 풍부한 감성을 지닌 화가로서 그는 크게 도발되고 또 고무되었다. 그의 화포의 결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색채로 충혈 되었다. 김병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만난 색은 이렇게 피처럼 붉었다. 빨간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붉은 피처럼 역동적으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호텔프린세스, 2006,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50x72.7
세상에는 ‘색’과 ‘빨강’이 같은 단어인 언어가 여럿 있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에서도 콜라라도(colorado)는  ‘색채가 있는’ 과 ‘빨간’을 동시에 뜻한다. 그러므로 라틴 문화권에서는 모든 색채가 다 붉은색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렇게 약동하느냐고, 왜 그렇게 심장을 두드리느냐고, 왜 그렇게 격렬히 춤추느냐고 묻는다면, 그 색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우리 안에는 빨강이 흐르고 있다, 피가 흐르고 있다’ 고.


<하루에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리브의 물빛과 아이들〉이나 〈원색의 화려한 의상과 시거가 어울리는 쿠바의 여인들〉 〈거리 행상들〉 〈코요아칸의 푸른 집〉 〈탱고〉 〈탱고의 탯자리 라 보카 지구〉 등의 그림에서 우리는 김병종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느낀 그 강렬한 색채감을 생생히 맛볼 수 있다. 그 살아 있는 색들이 핏줄을 타고 흐르니 그림 속 주인공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게 그저 단순한 동작이나 행위로 다가오지 않고 삶의 열정을 못 이겨 그렇게 뿜어내고 분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글이 아닌 까닭에 이 그림들에서 그가  ‘김병종의 라틴 화첩 기행’ 에 써내려간 사건들과 에피소드들, 생각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낱낱이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심장을 두드렸던 모든 감동과 감흥, 감회만큼은 그 어떤 수단이나 매체를 통한 것보다 이 그림들을 통해 더 선명하게, 더 직접적으로 공감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장미빛 인생, 2007,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45.5x65.1


김병종이 돌아본 주요 순례지 몇 곳을 꼽아 본다. ‘음악이 인생’ 이라고 외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호텔 나시오날과 ‘고통의 여 사제’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바닷물이 테라스를 쓰다듬는’ 헤밍웨이의 카페 라 테라사, ‘눈뜬장님으로 살아야 했지만 자신의 삶을 우주적인 아이러니로 긍정한’ 보르헤스의 생가, 그리고 ‘성녀와 악녀 사이의 세평을 오르내리던’ 에비타의 무덤 등이 우선 떠오른다.


김병종이 거쳐 간 이 장소들은 뜨거웠던 투쟁과 열정과 열기의 잔흔이, 아니 잔흔이 아니라 그 증폭된 에너지가 메아리처럼 맴도는 공간이다. 그 에너지가 스스로의 진한 농도를 못 이겨 이렇듯 강렬한 색채로 번져 나왔다고 할까. 그 색채로 물든 김병종의 그림이 그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갈구했던 ‘달디 단 빵과 독약처럼 진한 커피’ 같이 우리의 가슴에 영원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뜨거운 지구의 심장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여행이 앞으로 어떤 오디세이로 펼쳐질지 정말 궁금하다. 오디세우스의 여행 또한 십 년이었다는 사실이 이 주제를 위해 그가 예비해 두고 있는 십 년과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그만큼 그 서사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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